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2차 피트나 (문단 편집) === 수프리야 카와리지 === 684년 카와리지파의 주류가 나피와 나즈다를 따라 아바즈나 아라비아 반도로 이주했을 당시 그대로 바스라에 남은 이들이 있었다. 그 지도자인 지야드 빈 사파르와 압둘라 빈 이바드는 각각 수프리 종파와 이바디 종파의 시조가 되었다. 대체로 주바이르-우마이야 왕조의 지배에 순응하며 별 문제를 일으키지 않던 이들은 694년 핫자즈가 이라크 총독으로 부임한 후 반란에 나섰다. 먼저 타밈 부족 출신의 '수프리야' 지도자 살리흐 빈 무사리흐는 자지라 지방의 니시비스, [[신자르]], 다라 등지를 장악했으나 695년 9월 '''알 무답바즈 전투'''에서 전사했다. 뒤를 이은 [[바누 샤이반]] 출신의 샤비브 빈 야지드는 그해 봄 메카 순례에 나서며 같은 시기 순례 중이던 칼리파 아브드 알 말리크를 암살하려 시도했던 자였다. 샤비브는 나흐라완, 카나킨에서 우마이야군을 격파하고 200명의 정예병과 함께 쿠파를 공격했다. 696년 3월 그는 재차 루드바르, 알 바트에서 우마이야군의 장군 자이다 빈 쿠다마와 우스만 빈 카탄 알 하리티를 연거푸 격파했다. 마다인 총독이던 우스만 빈 카탄이 전사했고, 샤비브는 마다인에 대한 공세에 나섰다. 696년 여름, 3개월에 걸친 공방전 끝에 샤비브 휘하 600명의 '수프리야' 병력은 아타브 빈 와르카 앗 리야히를 격파하고, 마다인을 점령했다. 이에 수피안 빈 알 아브라드 알 칼비가 이끄는 수천 명의 시리아군이 파견되어 마다인 외곽에서 샤비브를 격파했다. 샤비브는 안바르로 후퇴하여 게릴라전에 나섰다가 잔여 병력과 함께 아바즈, 케르만 등을 주파하며 추격을 따돌리려 하다가 두자일 운하를 건너던 도중 익사했다.(697 혹은 698년) 이바디파는 우마이야-아바스 교체기인 제3차 피트나 때에야 군사적으로 두각을 드러냈다. 한편 이라크인들은 시리아 병력에 대비한 이라크 병력에 대한 차별로 핫자즈에게 반감을 품게 되었다. 그러던 700년 무크타르와 샤비브의 반란 진압에 투입되었던 압둘라흐만 빈 무함마드[* 아부 부크르의 외조카이자 킨다 부족장이던 쿠파 귀족 무함마드 빈 알 아샤트의 아들이었다.]가 쿠파 병력과 함께 아프간의 준빌 원정에 투입되었는데, 핫자즈의 무리한 진격 요구를 거부하고, 회군하여 반란에 나섰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